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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발견하는 힘 -고민하는 힘-


이 책은 재일 한국인 최초의 도쿄대 교수 강상중이 쓴 책이다. 일본의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유명한 저자는 정치학자로서가 아닌 인생의 선배로서 인생 전반에 대한 성찰을 말하고자 한다.
이 책은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베버를 들어 고민을 통한 삶의 의미를 말하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는 100년 전 본격적으로 근대화가 개막될 무렵,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근대 시대가 낳은 문제와 마주하기 위해 “고민하는 힘”을 발휘하였다.
저자는 그들이 살았던 제국주의 시대와 오늘날의 세계화 시대가 급격한 외부적 변화가 개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말하며, 시대적 영향으로 인간이 점점 소외되는 현실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인간답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또한 살아가기 위해 치열히 고민했던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베버에게서 자아와 일, 사랑, 돈 등 삶의 다양한 국면이 지닌 의미를 배우자고 권유한다.

이 시대는 “정보”가 무한정 열려있다. 그러므로 정보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정보 탐색 능력을 모든 것의 기본으로 삶는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점점 기억하지 않고 연구하지 않는 듯하다. ‘정보’라는 것을 맹목적으로 신뢰해, 점점 자신의 사고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의 맹점에 정곡을 찌르며 저자는 말한다.
‘알고있다(know)’와 ‘사고하다(think)’는 다릅니다. ‘정보(information)’ 와 ‘지성(intelligence)’은 같지 않습니다.  
사고와 지성이라는 말이 왠지 생소하게 느껴진다. 그만큼 우리의 삶 속에서 이 말이 멀리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든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이미 만들어져 있는 딱딱하고 생기 없는 정보들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 정보를 취하든 사고하여 지식을 만들든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적으로 사고하고 지성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인간이 정보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한정 짓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비춘다. 사람들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지식의 객관성을 정리하고, 세계가 그 원칙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객관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비 과학적이라고 판단하며 이 둘 사이에 경계를 두고 있다. 인간의 뇌는 분명 한계가 없고 그대로 두면 끝없이 확대될 것이지만 이렇게 우리가 만든 경계와 적당한 형태의 한정을 둠으로 인해 자연의 곳곳에서 오는 진정한 ‘지(知)' 의 모습을 놓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시 묻는다. ‘인간은 무엇을 알아야 할 것인가’ 하고. 어찌 보면 우리가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 물음일 수도 있겠다.

‘타자로부터의 배려’로 일의 의미를 표현 한 것이 인상 깊다. ‘일 한다는 것’의 의미를 말하며 소개한 일화가 있다.


 저자는 이 장면이 사람이 ‘일을 한다’는 행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사회 속에서 자기 존재를 인정받는다’ 는 것이라고.
저자의 말을 더듬어 보면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의 근원에는 사회적 동물의 본성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한다고 정리 한다면,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하는가’ 하는 심오한 질문에 한걸음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상대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을 ‘타자로부터의 배려’ 라고 한다면 자신이 상대를 인정해 주는 것은 ‘타자에 대한 배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의 배려는 단지 상호 인정이 아닌 상대에 대한 존중이 포함 되어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사회 속에서 배려하고 배려 받으며 자신이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고민 이라는 단어는 어렵고, 힘들고, 복잡한 느낌이다. 당연하듯 이렇게 느끼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이 시대 맹점의 일부라 할 수 있겠다. “고민? 무슨 고민?”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쳐보라. 그 안에서 자아의 내면을 더욱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고민거리를 찾게 할 것이다. 어쩌면 “고민 끝에 얻은 힘이 강하다.”라는 문구가 와 닿는 깊은 인생을 경험할 수 있는 첫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 simboyz 2009.06.24 08:37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수고하신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려본 사람은 알게됩니다. 인정받는다는게 얼마나 큰지를! 잘 읽었습니다.

  • Favicon of http://blog.naver.com/bluejames77 협객 2009.11.25 09:12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아니 같은 책을 읽었는데 이렇게 울림이 다르다니!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

  • Favicon of https://soulco.tistory.com 지성의 전당 2019.01.17 21:11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고민하는 힘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